일상

배달음식이 터졌다.

살랑살랑 배달합니다 2021. 12. 22. 23:14

배달지가 외곽지역인 주문 3개를 잡았을 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기사들은 주문을 콜이라고 부른다.

 밑에서는 콜이라고 쓰겠다)

 

두개만 잡을까 하다가 세개를 잡은건데, 

잡지 말까 하는 고민을 꽤 했었다.

한.. 1분? 

내가 1분이나 고민하는 동안에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만큼

이 콜들은 인기가 없었고,

결국은 내가 처리해주는 게 맞다는

쓸데없는 의협심이 시발점이었다.

 

시발.

 

배달을 2개 이상 들고 다닐 때는

하나를 완료할 때마다 남은 것을 다시 체크한다.

터졌거나, 없어졌거나 하는 불상사를

조금이라도 빨리 알기 위해서 ㅎ

 

첫번째 콜을 완료하고 배달통을 열어봤는데,

둘 다 멀쩡했고 따뜻했다. 귀여운놈들.

 

두번째 콜과 세번째 콜은

외곽지역의 같은 아파트 동이어서

이동만 잘 하면 

30분만에 거의 14000원을 버는 거였다.

 

그리고 아파트에 도착했는데

마라탕이 터져있었다. 

 

일단 손님한테 들고가서 물어봤다.

 

"죄송합니다만, 이게 오다가 터졌는데

 음식을 이대로 받으시고 

 음식값을 바로 받으실래요,

 아니면 음식을 다시 해 올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 생각하니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그만큼 음식은 엉망이었으니까..

(사진을 못 찍어놓은게 아쉽네..)

그냥 바로 음식 다시해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얘기하는게

담백했을 것 같다. 

 

손님은 난처해하다가 

음식을 다시 받겠다고 했고,

나는 식당에 전화해서

음식을 다시 부탁드렸다. 

 

11:30분에 이 콜을 잡을 때 꺼림칙했던 건, 이 긴 악몽을 예감했던 걸까..

 

새로 한 음식을 받고 출발하기 전에

편의점에 가서 단지바나나우유를 하나 샀다.

조금이나마 배달이 늦어진 것을 사과하고,

조금이나마 책임지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바나나우유의 효과는 아주 좋았다.)

 

 

배달을 완료하고
주요상점들이 있는 곳으로 복귀할 때 

솔직하게는 '오늘 쉴까'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오전타임에 콜이 적어서

효율이 떨어지다보니 사기가 저하됐었는데 

이런일까지 터지니 '오늘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진짜 진짜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6만원.

여자친구와 매일 6만원을 저금하기로

약속해놨는데,

오늘 이렇게 들어가면 

(물론 여자친구는 나를 이해해주겠지만)

내가 나한테 변명거리를 주는 것 같았다.

 

어쨌건 터진 일은 과거이고,

내 현재에 그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됐다. 

오전에 안 좋은 효율에 악재까지 겹쳤지만

나는 오늘 목표수익을 달성하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마음을 고쳐 먹으면

행동은 하기 쉽더라.

결과는 따라 오더라.

 

 

 

 

배달을 하다 보면

멘탈이 털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셀프칭찬,셀프격려 하면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오늘은 기억에 남을 만한 날이다.